- 이상각 신부님 - 「바리사이와 니코데모」 십자가 아래에서 다시 태어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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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64 이윤경 [achim9202] 스크랩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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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 마음에 머문 복음 요한7,40-53은
예수님 앞에서 완고하게 닫힌 마음과,
아직 다 알지 못해도 그래도 들으려 하는 열린 마음을 함께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을 두고 사람들의 마음이 갈라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하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사람들의 반응은 같지 않았습니다.
같은 말씀 앞에 서 있어도
누구는 마음이 열리고,
누구는 더 완고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미워하면 눈이 멀어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가 닫혀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보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지 못합니다.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군중이 왜 그분께 마음이 움직이는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어 하는 갈망보다
그분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일 앞에서도
감탄하고 찬미하기보다
어떻게든 흠을 찾고
무너뜨릴 이유를 찾습니다.
완고한 마음은
진실을 찾지 않습니다.
이미 내려놓은 결론만 붙들고 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무슨 메시아가 나오느냐.”
그들에게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직접 들어 보기 전에
먼저 심판합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이렇게 사람을 닫히게 만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이 다른 목소리를 냅니다.
니코데모입니다.
그는 전에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마음 한편에 예수님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밤에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다 큰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주 솔직한 질문이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묻는 질문이었고,
그래도 알고 싶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믿음은 때때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묻는 사람,
밤에라도 찾아와 들으려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직 완성된 믿음은 없어도
적어도 마음이 닫혀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만이 예수님 편에 서는 말을 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크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큰 용기입니다.
모두가 한쪽으로 몰려갈 때
그래도 먼저 들어는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이미 미움이 판결을 내려 버린 자리에서
그래도 사람을 먼저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니코데모의 말에도 귀를 닫습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그들은 무슨 말을 하느냐를 듣지 않습니다.
그 말이 옳은지를 보지 않습니다.
그저
너도 저쪽 편이냐고 몰아세웁니다.
미움은 이렇게
한 사람만 공격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이까지
같이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미워하면
무엇이 옳은가보다
누가 그 말을 했는가만 보게 됩니다.
시기와 질투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고,
선입견은
마음을 굳게 만들고,
완고함은
끝내 하느님의 일 앞에서도
무릎 꿇지 못하게 합니다.
그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께 와서
“다 큰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 말씀을 아직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들려주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제자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내어 주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한 사람의 삶을 부탁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새로운 관계를 열어 주십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되고,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며,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는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교부들은 이 신비를 깊이 바라보았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하와의 불순종이 죽음의 매듭을 묶었다면,
마리아의 순종은 그 매듭을 풀어
생명의 길을 열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래전부터
마리아를 새로운 하와로 불러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마리아를 단지 예수님을 낳으신 분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지체들,
곧 믿는 이들의 탄생에도
어머니로 연결되어 있다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니코데모가 물었던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십자가 아래에서 더 깊은 빛을 얻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영적인 태 안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정확히 말하면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이도록 허락하신
예수님의 은총 안에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을 배웁니다.
마리아는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 붙들어 두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께 데려가시는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예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며,
십자가 아래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들과 니코데모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한쪽에는
완고한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
끝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한쪽에는
아직은 두렵고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묻고,
그래도 들으려 하고,
그래도 함부로 단죄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은
모든 답을 이미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선입견보다 진실을 더 크게 여기려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미 안다고 생각해서
더는 들으려 하지 않을 때,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을 쉽게 판단할 때,
미움과 감정 때문에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은 조용히 묻습니다.
너는 정말 보고 있느냐.
너는 정말 듣고 있느냐.
너는 사람을 먼저 판단하고 있느냐,
아니면 먼저 그의 말을 들어 보고 있느냐.
그리고 또 묻습니다.
너는 다시 태어나고 싶으냐.
굳어진 마음에서,
선입견에서,
미움에서,
닫힌 눈과 닫힌 귀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으냐.
그 길은
십자가 아래에서 열립니다.
거기서 우리는
어머니를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받고,
예수님의 생명 안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을 배웁니다.
위의 글은 이상각 신부님 블로그의 글입니다.
[출처] 「바리사이와 니코데모」 - 십자가 아래에서 다시 태어나는 길| 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 블로그https://blog.naver.com/rsony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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