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29일 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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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68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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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말씀]
■ 제1독서(이사 50,4-7)
바빌론 유배시대 동안 익명의 예언자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온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메시아를 예고합니다. 예언자는 화려한 궁궐에 사는 권세의 임금과는 거리가 먼 비천한 종의 모습을 띠고 있는 메시아,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세상의 온갖 악의 대가를 대신 짊어지기를 수락하는 희생양으로서의 메시아를 그립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십니까
■ 제2독서(필리 2,6-11)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노래했던 초대 공동체의 찬미가 하나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초대교회가 일찍부터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기본적인 신앙 고백을 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으로서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의 모든 삶은 따라서 사랑의 선물로 인식되며, 그분의 부활은 이 사랑의 승리를 드러낸 사건으로 길이 머뭅니다.
■ 복음(마태 26,14-27,66)
예수님의 전 생애가 (구약)성경이 예고했던 바와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복음저자 마태오는 수난사건을 성경에 이미 예고된 사건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마태오에게 수난 사건은 하느님의 계획과 결정에 따라 펼쳐진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 상반되는 두 가지 역동적인 사건의 흐름을 타고 있다. 하나는, 사악한 마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 연이어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그 적대감의 희생양이 되신 주님의 반응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적대감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사랑으로 극복해 나가십니다. 인간의 적대감이 크면 클수록 주님의 승리는 더욱 빛납니다. 특히 마태오는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옛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갈라져 있던 세상이 끝나고, 이제 새 세상,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세상이 열리게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새 세상에는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다.”하고 고백하는 이방인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새김]
오늘부터 사순절의 정점인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가리키며, 우리 가톨릭교회의 전례 주년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경건한 때입니다. 이 기간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하신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특별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 예수님이 많은 백성으로부터 찬미 받고 왕으로 환대받는 승리의 날이며, 바로 그 백성으로부터 배척받아 십자가에 못 박힘을 기억하는 죽음의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구세주로 맞이하는 군중의 무리가 ‘신앙의 나’라면, 순간순간 예수님을 배척하고, 본능 또는 불의와 타협하여 미지근한 생활을 하는 무리는 ‘배신의 나’가 됩니다. ‘신앙의 나’와 ‘배신의 나’는 이렇게 동시에 교차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찬미하는 승리의 노래는 예수를 죽이라고 외치는 원성과 저주로 변해버립니다. 손에 손에 쥔 그 찬미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가 땅에 떨어지고, 그 대신 그 손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못과 망치가 쥐어집니다.
수난복음을 읽을 때마다 늘 착잡한 심정이 앞섭니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는 속담대로, 바로 우리 자신이 그런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유리한 존재로 다가오면 올리브 가지를 흔들어 그분을 환영하고, 내 뜻이나 욕구와 어울리지 않으면 그분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군중처럼 우리도 지금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고 거짓 증거를 내세우면서 서로를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는지 내 십자가를 지기는커녕 남에게 내 십자가를 떠맡기지는 않는지 내가 좀 안다는 것으로 형제의 무지를 고발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 건강으로 오히려 형제의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지는 않는지 나의 편의, 나의 이득을 위하여 형제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지는 않는지 반성해야 할 순간, 성주간, 첫날입니다.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묻히신 후 부활하여 천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가운데에서 고통당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하느님께 올려지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의 시기와 질투, 교만과 음모를 없애고 참된 사랑만이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의 가면을 벗기고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모든 것, 그것이 고통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십자가이든, 주어진 모든 것 받아들이면서, 주님을 따라나서는 삶 다짐하며 부활축제를 준비하는 성주간으로 들어섭시다.
조욱현 신부님_“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자유와 사랑”
1. 자유로이 선택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고 “아버지,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26,39)라고 기도하신다. 이는 강요된 체념이 아니라, 아버지 뜻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의 응답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순종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 그분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죽음은 그분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26,4)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죽기까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리 2,6-8) 예수님의 자유와 순명은 인류 구원의 길을 열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뜻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때 참된 생명과 영광에 들어간다.
2. 무죄하심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죄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무죄를 분명히 드러낸다. 빌라도의 아내는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27,19)라고 하고,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유다는 탐욕으로, 베드로는 두려움으로, 제자들은 안일함으로 스승을 떠난다.(26,14-26,56)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제자들의 배반을 두고 이렇게 주석한다. “주님은 제자들이 떠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택하셨다. 이는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당신의 은총이 더 크게 드러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Homiliae in Ioannem 82) 즉, 인간의 죄와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 안의 연약함조차도 은총을 드러내는 자리가 될 수 있다.
3. 수난 이야기의 교훈
성 아우구스티노는 십자가를 가리켜 말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이자, 동시에 그분의 학교이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이 사랑인지를 배운다.”(Sermo 218,3) 예수님은 자유롭게 십자가를 택하셨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났다. 따라서 수난 복음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자유와 사랑을 선택하도록 초대한다.
4. 성주간과 부활을 향한 삶
성주간은 우리를 다음과 같이 초대한다. 즉, 자유로운 의지로 매일 하느님을 선택하며, 제자들의 나약함을 거울삼아 내 삶을 성찰하고, 주님의 고통과 승리를 묵상하며, 부활의 기쁨을 세상과 나누는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성주간의 의미를 요약하며 이렇게 권고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분과 함께 고난을 나누어야 한다.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고는,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10,112)
5. 맺음말
성지주일은 단순히 예수님의 과거 수난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자유롭게 순명하며,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는 날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참된 해방과 부활의 생명을 준비하게 된다.
이병우 신부님<주님 수난 성지 주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3.29)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21,9)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26,22.23)
'극진한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
'성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주님수난성지주일에 '두 복음'이 전해집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전하는 복음'(마태21,1-11)이고, 또 하나의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마태26,14-27,66)입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삶의 자리였던 '갈릴래아에서' 죽음과 부활의 자리인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종착역에 도착하십니다.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으신 곳에 호산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사람들이 크게 환호합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우리가 당신께 청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기쁨과 승리, 구원의 희망'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크게 환호했던 바로 그 사람들, 기쁨을 소리 높여 외쳤던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두 마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지 않을까요?'
'하느님께 약속의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그 약속을 저버리면서 냉담하고 있는 우리의 두 마음!'
'미사 때나 기도할 때에 "아멘!"(예. 따르겠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이라고 힘차게 응답하면서도, 삶의 자리에서는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두 마음!'
우리의 이 두 마음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십니다.
우리의 이 두 마음이 한 마음이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극진한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를 정성된 마음으로.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 벳파게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매여 있는 암나귀와 그 곁의
어린 나귀를 곧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나에게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어라고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러면 그것들을
곧 보내 줄 것이다.”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자,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서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군중이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1,1-11).>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시간적인 순서만 보면
‘십자가 수난’의 ‘서막’과 같은 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과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이,
즉 지명수배령이 내려진 일이 먼저 있었고(요한 11,53.57),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입성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의 의미를 생각하면,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 수난의 결과를 미리 보여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뒤에 부활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 뒤에 승천과 성령강림이 있고,
언젠가는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그 재림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즉 승리자로서 개선 행진을 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마태 17,1-2), 승천 후의 예수님의 모습, 또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뒤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지주일을 맞이해서 예수님 뒤를 잘
따르자고 새롭게 다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잘 따르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부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노력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미 알고 있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행입니다.
정답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 풀이 과정이 복잡하고 어렵다고 해도, 정답을 이미 잘
알고 있다면,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신앙생활입니다.
2) 8절에 있는 ‘수많은 군중’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라,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고(요한 12,12),
대부분 갈릴래아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루카복음에는 ‘수많은 군중’이라는 말은 없고,
‘제자들의 무리’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19,37).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행렬을 구경하기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절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라는 말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입성 행렬을 함께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그 일은 실제로는 작은 규모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최고의회가 지명수배령을 내린 상황에서, 지명 수배된
인물이 그렇게 공공연하게 행렬을 하면 성전 경비병들이
바로 출동했을 텐데, 당시에 최고의회 쪽의 반응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인 빌라도 쪽의 반응도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관심을 가질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작은 규모의 일이었고,
제자들과 신자들을 위한 일종의 시청각 교육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을 따르면서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이 금방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예수님의 재판 때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군중이 같은 군중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몇 명 정도는 그렇게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은 주로 갈릴래아
사람들이었지만, 재판 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은 최고의회가 동원한 사람들,
또는 최고의회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었고(마태 27,20),
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변절한 사람들이 아니라 ‘구경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멀찍이 떨어져서 그 일을
구경만 한 사람들, 바로 그런 ‘구경꾼들’이 구원사업에서는
반대자들만큼이나 ‘큰 걸림돌’이 됩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 습관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 근처까지는 가겠지만,
‘안’에는 못 들어가고 ‘밖’에서 구경만 하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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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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