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31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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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11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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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유다와 베드로
오늘과 내일과 모레, 곧 성주간 화요일과 수요일, 그리고 주님 만찬 성목요일의 복음 말씀은 ‘최후의 만찬’을 배경으로 합니다. 최후의 만찬 하면 복음 말씀 다음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천재적인 화가의 세기적인 걸작이 떠오릅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던 중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라고 합니다. 다빈치는 바로 이 순간을 작품에 담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으나, 제자들은 놀람과 분노와 당황 등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베드로가 나서며, 베드로의 부탁을 받아들여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간접적인 방법을 통하여 유다를 지목하시며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하고 전합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제자들 이외에는 유다가 배신할 사람임을 알아채지 못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유다를 지목하시면서도, 회개하여 되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 간절하셨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신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갑니다.” 마지막 기회를, 주님의 간절한 바람을 저버리고 만 것입니다.
“때는 밤이었다”라고 합니다. 이제 어둠이 힘을 떨치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의 힘을 짓누르는 ‘영광’을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심으로써 예수님은 성부와 일치를 이루시고, 또 완전한 순명으로 당신의 신성(神性)을 드러내시며, 성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실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성부를 계시하시고 또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이러한 예수님과 하나가 되시고, 예수님을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동참시키시어 그분을 들어 높이는 것으로 화답하실 것입니다.
작별의 인사처럼 보이는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는 이 말씀은 실은 제자들을 떠나 성부께 돌아가셔야 비로소 제자들과 늘 함께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스승이 떠나가심이 성부께 돌아가심이라는 사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우리에게 라틴말이 더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Quo vadis, Domine?”) 베드로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참회와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동료 사도들보다 앞서 주님 따름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 인간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바로 오늘 복음에 묘사된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배반 예고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몸소 택하신 열두 제자 가운데 중심 역할을 했던 이 두 사람의 배반은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을 것이며, 그만큼 그들의 회개를 간절히 염원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잘못의 깊이와 크기가 어떠하든, 회개로 돌아와 용서를 청하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부활축제를 향해 마지막 한 걸음 더 내디디는 오늘 하루, 유다가 아니라 베드로의 모습을 본받아 회개의 눈물로 용서를 청하는 하루, 좀 더 깨끗한 마음으로 축제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오늘 복음은 최후의 만찬 중에 일어난 깊은 드라마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한 제자의 배신 사건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어둠과 빛의 갈림길을 드러낸다. 성 요한은 “때는 밤이었다”(30절)라고 기록한다. 단순한 시간의 묘사가 아니라, 영적 상황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유다가 밖으로 나간 것은 단순히 집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빛이신 그리스도 밖으로 나간 것이다.”(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62,5)라고 말했다. 유다는 빵을 받았지만, 그것을 생명의 성사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탐욕과 사탄의 유혹은 그를 공동체에서, 그리고 주님의 성체성사에서 멀어지게 했다. 유다가 떠난 뒤 예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다.”(31절)라고 말씀하신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신의 순간, 죽음이 다가오는 그 시간에 예수님은 영광의 때를 선포하신다. 성 이레네오가 말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사람의 아들은 높이 들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다.”(Adversus Haereses IV,20,7) 하느님 영광은 세속적 승리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사랑(필리 2,8) 안에서 드러난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류의 새로운 계약의 시작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라고 고백하지만, 곧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듣는다. 이는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 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베드로의 열정은 진실했으나, 그의 힘은 약했다. 그러나 그의 회개는 더 큰 은총을 낳았다.”(Homiliae in Ioannem 72,1)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베드로처럼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용기와 회개이다.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고, 그 눈물 속에서 다시 빛을 보았다.
우리 안에는 유다의 탐욕과 베드로의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때로는 어둠을 향해 걸어가고, 때로는 주님을 고백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차이는 분명하다. 유다는 어둠에 머물렀고, 베드로는 눈물을 통해 빛으로 돌아왔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눈물은 세례의 물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De Paenitentia II,8,75) 오늘 성체의 식탁에 참여하는 우리는 유다처럼 그분을 배반하기보다, 베드로처럼 약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은 빛과 어둠을 넘나들지만, 언제나 다시 빛을 향해 머리를 돌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나의 두려움과 약함을 주님께 고백하며, 베드로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릴 용기를 청하자.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나를 배신으로 이끄는 탐욕과 유혹을 멀리하고, 주님의 십자가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이병우 신부님_"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13,21.38)
'지금 일어나고 있는 두 배신의 모습!'
오늘 복음(요한13,21ㄴ-33.36-38)은 '두 배반의 말씀', 곧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두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유다인들에게 팔아 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과, 으뜸 제자로 선택된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13,26)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13,38)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후에 직접 뽑으신 제자가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이 두 제자의 배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배신 또한 하느님께서 하신 일, 예수님 죽음의 도구로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정말 예수님처럼 우리의 마음도 산란해집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두 배신의 모습이 지금 여기에서, 나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더 열정적이지 못한 우리의 미지근한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아멘!"을 외치고도, 미사 때 거룩한 성체를 받아모시고도, 성당 밖에서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포장된 우리의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망하거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죽으러 오신 이유가 바로 그런 우리를 위한 것이기에.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ㄷ)
송영진 신부님_<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요한 13,21-22).>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1-33)>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6-38)>
1)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끝까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그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회개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신 것은, 그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예고 말씀들은, 바로 앞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3,19).”
이 말씀은, 원래는 유다의 배반에 연결되는 말씀이지만,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일이 나의 예고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도들이 그렇게 확신하게 된 것은
수난 때가 아니라 부활 후입니다.
“내가 나임을”은, “내가 메시아임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은 모르고 당하는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하는 일도 아니고, 메시아로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주는
일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모든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셨다면,
나쁜 일들을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막지 않으셨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은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간에.>
2)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일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여기서 “예수님을 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
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모른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안 믿는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일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부정한 일이고,
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대단히 ‘큰 죄’가 되는데, 그 일을
‘배반’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유다의 경우는, 예수님을 떠나서 적의 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배반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경우는, 적의 편으로 넘어간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서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것도 아닙니다.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정말로 본의 아니게 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일반적인 의미의 배반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3)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는 주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보다 더 많이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넘어졌지만, 금방 다시 일어섰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일은, 베드로 사도
자신의 고백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큰데, 그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 자체가 그의 ‘통회’를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마저도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나약한 우리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일이고, 큰 교훈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출처] 성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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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근 신부님_* 오늘의 말씀(3/31) : 성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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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12
최원석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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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31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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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11
최원석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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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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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10
이경숙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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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없는게 3가지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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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09
김중애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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