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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부활을 믿으면 성경을 읽는다.

188931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9:09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 20,9)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반전의 날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삼킨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생명이 죽음을 집어삼킨 부활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결론은 묘하게도 '부활의 기쁨'이 아니라 '무지(無知)'에 대한 지적으로 끝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보았지만, 아직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부활을 눈앞에 두고도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을 읽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경이 우리에게 '소리'에서 '말'로, '말'에서 '말씀'으로, 마침내 '진리'로 변화되는 부활의 영성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소리(Sound):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성경은 배경 소음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가 넘쳐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리는 우리 귀를 스쳐 지나가는 공기의 진동일 뿐입니다. 뜻을 모르는 외국어나 숲속의 바람 소리는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이렇습니다. 내가 그 소리를 낸 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Word): 유다인들에게 성경은 지식과 정보였습니다 그 소리에 뜻이 담기면 비로소 '말'이 됩니다. 유다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달달 외우기까지 했지요. 그들에게 성경은 조상의 역사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법전이며, 풍부한 정보가 담긴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왜 이 '말'들이 그들을 바꾸지 못했을까요? 왜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정작 그 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그것은 그 말이 여전히 '나를 바꾸는 힘'이 없는, 객관적인 정보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정보는 나를 똑똑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내 자아를 죽이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차를 몰 때 GPS에서 나오는 "우회전하세요"라는 소리는 정보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따르지만, 그 기계와 사랑에 빠지거나 그 기계를 위해 목숨을 걸지는 않습니다.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보는 여전히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함이지, 나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아닙니다. 말씀(The Word):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피 섞인 생명입니다 '말'이 '말씀'이 되는 순간은 그 말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분의 입에서 나올 때입니다. 부모가 해주는 말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형제끼리 우애 있게 지내라"라는 부모의 말은 자녀에게 귀한 '말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 안에 부모가 나를 먹이고 입히며 쏟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어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말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가 말로는 "사랑해라" 하면서 행동으로는 이기적이라면, 그 말씀은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진리'로 확증하시기 위해 가장 무거운 무게를 더하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피'입니다. 「피로 쓴 유언장」 어떤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유산으로 막대한 보물을 남겼다고 칩시다. 그리고 유언장에 "서로 싸우지 말고 공평하게 나눠라"라고 썼습니다. 평소에 아버지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아버지가 죽자마자 유언장을 무시하고 재산 싸움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평생 자식들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자신의 피로 그 유언장을 썼다면 어떨까요? 그 종이에는 아버지의 생명이 묻어 있습니다. 자식들은 그 유언장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며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아버지는 그 말씀에 당신의 성령, 곧 피와 생명을 섞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당신이 하신 모든 '말'이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생명'임을 증명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진리(Truth): 하느님 자녀에게 성경은 살아있는 통치자의 음성입니다 하지만 '피 섞인 유언'도 시간이 지나면 잊힙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수십 년이 지나면 형제들은 다시 재산 때문에 법정으로 갑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죽은 분이 뭘 어쩌겠어?"라며 말씀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메마르고 힘을 잃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자녀에게만 허락된 '부활'의 절대적인 필요성이 등장합니다. 만약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거실 소파에 앉아 형제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면 어떨까요? 형제들은 서로 욕하고 싸우려다가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신 부모님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즉시 싸움을 멈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부활을 믿는 하느님 자녀에게 성경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고 사라진 위인이 아니라, 지금 성체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지금 내 곁에 살아계셔서 내 삶을 보고 계신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분이 하신 말씀이기에,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권능을 가진 '진리'가 됩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보고 계신데 어떻게 그분의 말씀을 무시한 채 내 욕망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그분이 죽었다고 믿거나, 혹은 그분의 눈을 피하고 싶다는 영적인 거부입니다. 소리에서 진리까지: 부활의 빛으로 읽는 성경 오늘 복음에서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제자들은 이제 겨우 '말'의 단계에서 '말씀'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보고서야 스승님이 하셨던 말씀에 무게가 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성령이 오셨을 때, 그 말씀은 비로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성경이 그저 귀를 스치는 배경음악인 '소리'이고, 유다인들에게는 머리로만 이해하고 지키려 했던 지식인 '말'이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분의 사랑이 담긴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부활을 믿는 하느님 자녀에게 성경은 내 삶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스리고 이끄는 '진리'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체 안에 살아계셔서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신 자녀는 부모님의 눈에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하느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심을 믿는 우리는,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내 삶에서 헛되이 돌아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리빙스턴의 낡은 성경」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소지품을 정리하다가 낡을 대로 낡은 성경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그 성경 책 여백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다. 그분은 이 약속을 지키셨다. 그러니 나도 이 말씀을 끝까지 믿는다." 리빙스턴이 사자에게 물리고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아프리카 대륙을 누빌 수 있었던 힘은, 성경 속의 글자가 아니라 그 글자 뒤에서 자신을 보고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데이비드 리빙스턴 전기) 결론: 말씀 안에 머무는 삶 부활 대축일에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화려한 꽃봉헌도 좋지만, 일 년 내내 먼지가 쌓여 있던 성경 책을 펴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성경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죽은 위인의 전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왕의 칙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분과 눈을 맞추십시오. "너는 지금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느냐?"라고 묻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과 '톨레 레게(Tolle Lege)'」 가톨릭의 위대한 성인이자 교회 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이 바로 이 '살아있는 진리'의 힘을 증명합니다. 서기 386년, 그는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자신의 방탕한 생활과 지독한 영적 갈등 때문에 죽음과 같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그때 담장 너머에서 어린아이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Tolle Lege! Tolle Lege!)"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 단순히 아이들의 장난 섞인 '소리'가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께서 지금 자신에게 직접 내리시는 '생명의 명령'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즉시 집으로 달려가 성경을 펴서 눈에 들어오는 첫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습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행동합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내다보지 마십시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수십 년간 그를 옭아매던 의혹의 안개와 정욕의 사슬이 단숨에 녹아내렸습니다. 성경 속의 글자가 수백 년 전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심장 소리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성경 안에서 마주했을 때, 세기의 탕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살아계신 분을 믿는 자에게 성경은 이처럼 운명을 바꾸는 기적의 도구가 됩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제8권).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요, 부활을 믿으면서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을 앞에 두고 눈을 감는 것과 같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삶에서 그분의 말씀이 부활할 차례입니다. 믿지 않는 이의 소리를 넘어, 유다인의 말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말씀을 넘어, 하느님 자녀의 '진리'로서 성경을 대합시다. 그 말씀의 빛 안에서 기쁘고 복된 부활 시기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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