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제2주일 가해, 하느님의 자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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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45 박영희 [corenelia] 스크랩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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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가해,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음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공, 재물, 권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풍요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믿고 의지하면, 그 능력에 힘 입어 내가 원하는 것들을 풍족하게 얻게 될 거라고 믿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참된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환한 빛이 주는 화려함에 이끌려 불 속으로 날아든 나방들이 결국엔 허무한 죽음을 맞는 것처럼, 성공 재물 권력에 의지하는 이들이 맞게 될 결말은 멸망 뿐이지요. 둘째는 과학, 기술, 숫자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편리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신뢰하고 따라가면 복잡하게 신경쓰거나 고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삶을, 즉 쉽고 편한 삶을 살게 될거라 믿는 겁니다. 하지만 ‘바벨탑’을 아무리 높이 쌓아봐야 결코 하늘나라에 다다를 수 없듯, 쉽고 편한 그 길은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나태함과 안일함이라는 모래 위에 쌓은 탑은 고통과 시련이라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 때 우리는 깊은 절망의 구렁 속으로 빠져들게 되겠지요. 셋째는 영원히 변치 않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가치, 즉 온 세상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살아가는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는 이 세번째 차원의 믿음을 지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증거를 자기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는 ‘의심의 아이콘’이라 오해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지요. 만약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주님께서 무력하게 수난당하고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나버린 다른 제자들처럼 고향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끝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아직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살아계실 때 몇 번이나 강조하신 것처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리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고대하던 주님의 발현이 하필 자기가 자리를 비웠던 그 때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움이, ‘나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다’라는 간절함이, 하필 자기가 없을 때에 나타나신 주님에 대한 서운함이 너무나 컸기에 다소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며 주님의 발현사건 자체를 부정하려고 든 것이지요.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라 못믿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자리에 자기만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질까봐 두려웠던 겁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셨던 예수님은 오직 토마스 한 사람을 위해 다시 한번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 몸에 남아있는 고통의 흔적들을 토마스에게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이미 부활을 통해 완전한 존재가 되셨기에 그 상처를 지니고 계실 필요가 없었지만, 그 상처를 지니고 있으면 뼈와 살을 파고드는 극심한 고통으로 괴롭고 힘들었지만, 토마스를 사랑하는 당신의 진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기꺼이 그 상처들을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 상처를 토마스에게 보여주시면서 간곡하게 호소하십니다.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너를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구하고 싶어서 이 상처들을 참아받고 죽음마저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왜 단 한 번의 실망으로 그런 내 사랑을 의심하느냐고, 나는 언제나 너를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있으니, 혹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늘 너와 함께 있으니, 더 이상은 내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달라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는 구절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눈에 보이는 증거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께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그분의 사랑이 주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진심어린 사랑이 토마스의 마음에 커다란 울림을 일으켰습니다. 나는 주님께 특별히 잘 해드린 것도 없는데, 대단하고 잘난 사람도 아닌데, 그런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마음을 다해 사랑해주시는지…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토마스의 마음 속에 안개처럼 짙게 껴있던 두려움과 불안함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주님 사랑의 온기가 의심과 불신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을 녹여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주님을 향한 자기 진심을,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과 절절한 사랑을 진실한 신앙 고백으로 드러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믿음을 고백한 이들은 많았지만, 그분을 ‘하느님’으로 믿고 마음 안에 받아들인 건 토마스 사도가 처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참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 즉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십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이 내 눈을 가려서 그분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고, 고통과 시련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서 그분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토마스처럼 의심 속에서 불행을 겪지 않고,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건 주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증거로 확인해야만 믿는 사람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 주님께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는 굳은 확신 속에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수많은 성인들의 절절한 고백과 증언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알고 있지요. 그런 점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씀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시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나 한결같이 사랑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게 된 우리가 그분께 받아 누리는 사랑이, 주님을 직접 보고 믿은 토마스가 그분께 받아 누린 사랑보다 결코 작지 않다고, 그러니 힘과 용기를 내어 당신께 다가오라고 독려하시는 겁니다. 주님으로부터 이토록 큰 사랑을 받는 우리는 이미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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