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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6년 4월 21일 (화)부활 제3주간 화요일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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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묵상

189203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6-04-20

이병우 신부님_"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

 

'단순한 믿음!'

 

오늘 복음(요한6,22-29)은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군중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6,26-27)

 

그러자 군중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6,28) 예수님께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6,29)

 

모든 것이 넉넉하고 편리해 진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보다는 사제의 수도 많고, 성당도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믿는 것이 더 힘들고 더 약해져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히려 먹고 살기가 더 힘들고 어렵고 생활하기가 불편했던 옛날의 믿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단순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빵에 대한 믿음, 썩어 없어질 것에 온 힘을 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단순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제의 손을 통해 겸손한 모습으로 제대 위로 내려오십니다.

 

오늘도 단순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이 양식을 얻으려고 힘씁시다!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생태영성사제피정'을 떠납니다. 왜관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 문화영성센터에서 있는데,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조욱현 신부님_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오늘 복음은 빵의 기적 이후, 예수님을 따라온 군중과 나누신 대화이다. 군중은 배부르게 먹었던 경험에 사로잡혀, 다시 그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시선을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주신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이 말씀은 단순히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넘어,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너의 배가 아니라, 마음을 먹여라. 썩어 없어질 음식은 배를 채우지만,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빵은 마음을 채우고 배를 채우지 않는다.”(In Ioannem Tractatus 25,12) 우리는 종종 현세적인 만족, 물질적 풍요를 영원한 행복과 혼동한다. 그러나 그것은 금세 사라지고 다시 굶주리게 만든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혼 깊은 곳을 채우시는 양식이시다. 
 
군중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 여기서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삶 전체를 맡기고 따르는 신뢰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모든 선한 행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Commentarium in Ioannem, 13,3) 믿음은 곧 살아 있는 행동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양식을 받아들이는 통로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그 믿음 안에서 삶 전체가 변하고 선행으로 열매 맺는다. 
 
예수님께서는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27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곧 성체성사의 신비를 예고하는 말씀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믿음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임을 보여 준다. 성체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1336항)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단순한 빵이 아니라, 당신 자신, 곧 당신의 몸과 피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사적 은총이다. 
 

우리는 매일 많은 것을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그 양식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우리가 성체 안에서 그분을 받아 모실 때, 우리의 마음은 참된 만족을 얻게 되고,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며, 삶은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여정은 하느님의 뜻을 믿고, 그분의 아들을 따르며,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길이어야 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


말씀 묵상에 앞서, 이스라엘의 지명 하나에 대하여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통상 ‘호수’라 불리는 장소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호수는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의 젖줄 역할을 하는 갈릴래아 또는 겐네사렛 호수를 가리키는데, 요한복음에만 티베리아스 호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호수가 갈릴래아 지역에 위치해 있어 갈릴래아 호수, 호수 북쪽에 위치한 겐네사렛 평원에서 이름을 따 겐네사렛 호수로 불렸던 것처럼, 티베리아스 호수도 호수 서쪽에 위치한 (갈릴래아 지역의 행정 도시) 티베리아스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티베리아스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14-37년)를 기념하여 건설된 도시로서 비교적 후기의 지명이라는 점에서, 요한복음서가 이 지명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후기에 저술되었음을 일러줍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이튿날 예수님을 다시 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 애써 찾음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하고 평가하십니다. ‘기적’ 대신에 ‘표징’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요한복음은, 구약성경의 전승을 받아들여, 표징을 예수님에게서 종말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시, 곧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표시로 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하고 이르십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권능은 인정하면서도, 그 권능을 통한 행위의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 권능에서 자기들이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인 이득, 곧 배고픔 달램 때문에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예수님이 권능으로 행사하시는 일을 하나의 ‘표징’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발생합니다. 이 표징 안에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아볼 때, 비로소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저자 요한에게 ‘영원한 생명’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화해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에, 생명과 믿음은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영원한)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 보장의 대전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당신 자신을 십자가상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복원해 주신,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여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바로 하느님의 일임이 선포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부족함이 있더라도 꾸준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고백할 때마다, 우리는 감히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이 지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미래의 생명도 약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세속적인 그 어느 것보다도, 하느님과 화해하여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지상 최대의 행복임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며, 그러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걸어가는,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2-29)>


 


1)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바로 메시아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원한다면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빵의


기적’에서 메시아의 표징을 보지 못하고 빵만 보았다.


그래서 나에게 와서 ‘영혼의 구원’은 청하지 않고


‘몸의 배부름’만 청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는,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라.”입니다.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는, “너희는 ‘영원한 생명’만 추구하여라.”입니다.


 


2)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의 필요와 가치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일용할 양식’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몸의 건강’도 필요합니다.


정말로 배가 고프고, 정말로 몸이 아플 때에는


신앙생활 자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힘’은 하느님 나라까지 잘 걸어가는 데에 필요한


보조 수단일 뿐이지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몸의 배부름’과 ‘몸의 건강’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일이고,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3)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마르 10,17).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1-22).”


재물이 많은 사람이든지 하나도 없는 사람이든지 간에,


영원한 생명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간 그 사람은, ‘간절함’이 부족했던 것일까?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했던 것일까?


우리는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는 사람은 몸도 병들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비참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상황에서는 하느님 나라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정말로 몸이 아파서 고생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정말로 큰 불행을 만나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고통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상황에 있는


이들의 심정도 모르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다보면, “신앙생활이란, 먹고사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의 취미생활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고서


‘썩어 없어질 양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직접, 그리고 늘, 배고프고 고달프고


힘든 생활을 하신 분입니다(루카 9,58).


<지금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것은 죄악입니다.


사랑 실천이 없는 양식은 모두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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