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6년 5월 7일 (목)부활 제5주간 목요일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가톨릭마당

sub_menu

전삼용 신부님_기쁨의 충만에 이르는 법: 이웃 사랑은 십자가의 해설서

189482 최원석 [wsjesus] 스크랩 09:02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9-11)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간 목요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율법과 계명을 나를 얽매는 답답한 사슬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용서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실천하기 너무나 버겁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계명을 지켜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이유가, 우리를 노예로 부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순종과 희생이 어떻게 기쁨의 샴페인을 터뜨리는지, 이 역설적인 복음의 신비를 풀기 위해 아주 가슴 시린 단편 영화 한 편을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3년에 제작된 체코의 단편 영화 '다리' (원제: Most)의 이야기입니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도개교(배가 지나갈 때 들리는 다리)를 관리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일터에 데리고 갑니다.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멀리서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열차가 빠른 속도로 다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다리는 배를 통과시키기 위해 위로 들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알아챈 어린 아들이 기차를 멈춰 세우려다가 발을 헛디뎌 거대한 다리의 기계 톱니바퀴 속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멀리서 이 참상을 목격한 아버지는 경악합니다. 아버지는 극한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레버를 당겨 다리를 내리면 톱니바퀴에 낀 아들은 압사하지만 기차의 수백 명은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레버를 당기지 않으면 기차는 강물로 추락해 모두가 몰살당합니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리며, 결국 기차를 살리기 위해 레버를 당깁니다. 굉음과 함께 다리가 내려앉으며 아들의 생명은 부서졌고, 기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사히 다리를 통과합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꿈에도 모른 채 창밖을 보며 웃고 떠듭니다. 마약을 투약하려던 한 젊은 여성도 창밖을 무심코 바라봅니다. 바로 그때, 기차 창밖으로 아들의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짐승처럼 오열하며 절규하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아버지와 그 여성의 시선이 아주 짧은 순간 마주칩니다. 그 순간, 여성의 영혼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꽂힙니다. '아! 지금 내가 이 기차 안에서 평온하고 안전하게 앉아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저 남자의 가장 소중한 아들의 목숨을 갈아 넣은 희생 덕분이었구나.' 이 영화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기차 안의 모든 승객이 목숨을 건졌지만,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그 기쁨의 깊이를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직 한 사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희생한 아버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목격한' 여성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시어 지금 기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에 탄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그 구원의 기쁨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충만한 기쁨'으로 온전히 누리려면 한 가지 절대적인 조건이 필요합니다. 영화 속 여성처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아드님을 십자가의 톱니바퀴에 밀어 넣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찢어지는 고통을 내 가슴으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논리가 하나 파생됩니다. 만약 그 기차 안의 여성이 아이들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타인에 대한 연민이 1그램도 없는 소시오패스였다면 어땠을까요? 아버지의 오열을 보고도 '운수 나쁜 영감이네' 하고 고개를 돌렸을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무엇인지 공감할 능력이 없기에, 아버지가 치른 희생의 무게가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식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거울 신경 세포'의 법칙입니다. 내가 한 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면, 타인이 나를 향해 쏟는 사랑의 크기를 결코 해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밥상에 올라온 생선의 가장 맛있는 살을 발라 내 밥그릇에 올려주실 때, 그것이 눈물 나는 희생인 줄 모릅니다. 철없는 생각에 '우리 엄마는 생선 대가리만 좋아하시는구나'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어른이 되어 자식을 낳고, 내 입에 들어갈 밥 한 숟갈을 굶어가며 자식의 입에 고기를 넣어줄 때, 비로소 과거 어머니의 마음을 거울처럼 반사하여 깨닫게 됩니다. '아, 우리 엄마도 고기를 좋아하셨구나. 나를 너무 사랑해서 당신의 본능을 꺾으신 거였구나.' 이처럼 사랑의 실천이라는 데이터가 내 안에 쌓여야만, 나를 향한 타인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안목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20절은 이 진리를 명확히 짚어줍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출처: 1요한 4,20). 눈앞의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보듬으며, 밉상인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 내 자존심을 꺾는 뼈아픈 희생을 해보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위해 치르신 희생의 값이 얼마인지 영원히 계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왜 원수를 사랑하고,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이웃을 품어주어야 합니까? 저 사람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나 자신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라는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과 희생은 마치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쓰인 100억짜리 당첨 수표'와 같습니다. 내 손에 100억짜리 수표가 쥐어져 있어도, 내가 그 언어를 읽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종이 조각일 뿐 내게 어떤 기쁨도 주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희생'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 자존심을 꺾고 이웃을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리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언어인 '희생과 사랑'이라는 외국어를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게 된 순간, 비로소 내 손에 들린 십자가가 100억을 뛰어넘는 우주적인 러브레터임을 읽어내게 됩니다. '아! 창조주 하느님이 나를 살리려고 당신 아들의 목숨을 내놓으셨구나! 내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존귀한 존재구나!' 이 압도적인 자존감을 깨닫는 순간, 우리 영혼에는 세상 어떤 권력도, 돈도, 질병도 빼앗을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 실천은 하느님께 바치는 무거운 세금이 아니라, 내 영혼의 기쁨을 인출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르는 작업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계명을 실천할 때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된 기쁨에 도달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제 자신의 아주 내밀하고 소중한 실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크게 다치셔서 수원 빈센트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와 아버지를 간호하시느라 병원에서 새우잠을 주무셔야 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병원 식당 설거지를 도와주시고 남은 밥을 조금 얻어 드시며 버티셨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저는 고모 댁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고모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마음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당신의 어머니를 찾으러 나갔다가 길을 잃고 평생 고아로 살아본 뼈저린 상처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니 '내 자식마저 나처럼 고아를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공포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셨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헤매셨습니다. 그러다 덤프트럭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쌩쌩 달리는 큰길가를 지나치려는데, 웬 아이 하나가 그 위험한 트럭들 사이 먼지구덩이에 주저앉아 흙장난을 하고 있더랍니다. 바로 저였습니다. 어머니는 달려와 저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잃어버린 목숨을 찾은 기쁨과 안도감에 우셨고, 저는 사실 상황 파악도 못한 채 그저 배가 고파서 같이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사제가 되고, 1년 동안 냉담자들을 찾아다니며 방문 사목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거리를 헤매며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헤매는 고단한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저는 비로소 저를 찾아 먼지구덩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셨던 어머니의 그 절박한 심정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순간, 저는 제 영혼을 관통하는 거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마주했습니다. '아, 하느님도 나를 찾으러 이 먼지투성이 세상으로, 십자가라는 위험한 트럭이 달리는 길가로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오셨구나!'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0). 이 말씀이 지식이 아니라 펄떡이는 생명으로 제 영혼에 부딪혀 왔습니다. 내가 그토록 절박하게 사랑받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제 영혼에는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미칠 듯한 기쁨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웃을 찾아 나서는 사랑의 수고가 어머니를 이해하게 했고, 어머니를 이해하니 하느님의 사랑이 해독된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똑같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수고를 거부하면,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이 흘리신 피와 땀을 보고도 "아이고, 하느님은 원래 십자가 지는 걸 좋아하시는 특이한 분이구나" 하고 넘겨버리는 영적 바보가 되고 맙니다. 교부 성 대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흘리는 땀방울만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유일한 저울표입니다." (출처: 성 대 그레고리우스, 『복음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21 0

추천  1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