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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5년 9월 1일 (월)연중 제22주간 월요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가톨릭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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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신앙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긴 잠’과 같은 것입니다.>

183782 최원석 [wsjesus] 스크랩 2025-07-2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19-27)”

1)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이야기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한 일이 아니라, 당신이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다음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유와 목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요한 11,4).”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4-15).”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믿음에 응답’하려고 라자로를 살리신

것은 아닙니다. 라자로는 들러리가 아닙니다.

그 일은, 마르타를 위해서 일으키신 기적이 아니라,

군중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즉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물론 마르타도 그 군중에 포함됩니다.>

2) 앞의 6절에,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는 말이

있는데(요한 11,6),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은 아닙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전한 라자로의 소식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을 때에 라자로는 이미 죽은 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뒤의 39절에,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머무르신 시간이 이틀이기 때문에,

자매가 보낸 심부름꾼이 예수님께 오는 데에 하루 걸렸고,

예수님께서 자매에게 가시면서 또 하루가 걸린 것으로

계산이 되는데, 아마도 라자로는 자매가 예수님께

심부름꾼을 보낸 직후에 죽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를

사랑하시면서도(요한 11,5),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머무르신 것은, “예수님은 인간적인

애정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만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3)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인에게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어 누리는 새 인생으로

건너가는 과정일 뿐이다.” 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 ‘영원한 새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주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안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믿는 사람들도 한 번은 죽겠지만, 묵시록에서 말하는

‘두 번째 죽음’은(묵시 20,11-15)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된다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1테살 4,17).

따라서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4)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막연하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일은 ‘부활’이 아니라

수명이 조금 더 연장된 일이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수명을 조금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주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것은, 조금 더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마르타의 희망도 단순히 라자로의 수명을 조금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만이

메시아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신앙고백은,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만큼이나(마태 16,16) 중요한 고백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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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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